북감자

  • 송라
  • 2026-06-14 19:14 조회 200



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것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주말 저녁, 빈 손에 주머니마저 쓸쓸한 귀갓길이었으나 내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묵직하고 가멸다.


 서울에 계신 누님께 맛 좋은 햇감자를 아낌없이 보내드리고 났더니, 정작 집안 대장님 보여줄 감자가 몇 알 남지 않아 마음이 켕기던 참이었다. 마침 길가에 형수님이 보이기에 넉살 좋게 만 원짜리 한 장 내밀며 "감자 좀 주셔" 했더니, 형수님은 그럴 줄 알고 미리 박스에 담아두었다며 검은 봉지 가득 감자를 꾹꾹 눌러 담아주신다. 미안한 마음에 조금만 달라고 손사래를 쳐도, 넘치는 시골 인심은 기어이 봉지가 터질 듯 정을 채워 넣고야 만다.



 그때 마침 밭에서 농약을 치고 땀방울을 흘리며 들어오시던 친형님이 나를 불러 세우신다. "동생 주려고 감자 한 박스 챙겨놨다" 하시는 형님께, 이미 형수님이 주셨다고 하니 형님은 호탕하게 웃으며 역정을 내신다. "그깟 거 겨우 고만큼 줬냐, 한 박스는 통째로 안겨야지!" 하시는 그 투박한 목소리 행간마다 동생을 향한 피붙이의 진한 사랑이 꿀컥 묻어난다. 버스 타고 가는 길 어깨 무거울까 봐 염려하는 형수님의 세심함과, 하나라도 더 퍼주고 싶은 형님의 굵직한 마음이 한데 버무려져 내 손에 들린 감자 봉지가 황금덩이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



 버스 창밖을 보며 문득 인생의 오랜 진리를 되짚어본다. 주머니에 돈이 떨어지면 신기하게도 배는 더 고프고, 평소엔 생각도 안 나던 먹고 싶은 것들이 유독 간절해진다. 지갑이 비어 갈 때 밀려오는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와 헛헛함은 예나 지금이나, 아니 앞으로 천 년의 세월이 흘러 세상이 천지개벽을 한대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서글프고도 솔직한 이치일 것이다.



 오늘 만약 내 주머니에 돈이 넉넉했더라면, 큰 숙제 같던 집세 백만 원을 든든하게 송금하는 홀가분함도 몰랐을 것이요, 주말 경마 소식에 눈이 멀어 가상 베팅 대신 있는 돈을 다 꼬라박고 장탄식을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주머니가 비어 있었기에 오히려 내 전 재산을 지켜냈고, 돈이 없었기에 형님과 형수님이 내어주신 사람의 정이 얼마나 달고 눈물겨운 것인지 뼈저리게 깨닫는다.



 인간의 유혹과 결핍은 천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겠지만, 그 거친 삶을 지탱해 주는 것 역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고 박스째 감자를 내어주는 '사람의 온기'라는 사실 또한 변하지 않으리라.


이제 집으로 돌아가 솥에 불을 올린다. 


김이 펄펄 나는 포슬포슬한 햇감자를 안주 삼아, 내일부터 시작될 아내의 잔소리를 기분 좋게 기다리며 홀로 마시는 소주 한 잔. 오늘 밤은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천하제일의 부자가 되어 잔을 높이 들어 올린다.



  • 송라 2026-06-14 20:09:51
    편의점 없애버려야 소주한병 살데가 없네 10년만에 한번 마셔보려하니
  • 비움 2026-06-14 20:33:29
    있음의 쾌락도 훌륭하지만 없음의 여유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햇감자가 주는 삶의 그 절절한 손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