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마(5) - ‘차돌’
‘포경선’의 빈자리를 채운 ‘차돌’
뚝섬경마장이 마무리될 무렵 명마 ‘포경선’이 은퇴를 하면서 새로운 명마를 바라는 경마팬들의 바람에 호응을 한 신예가 바로 ‘차돌’이라 할 수 있다.
‘차돌’은 ‘포경선’이 하향세로 접어들던 1986년 12월 미국에서 들어왔는데, 당시 체중이 520㎏에 달할 정도로 덩치가 워낙 커서 우려를 낳기도 했다. 당시에는 덩치가 아주 큰 말이 잘 뛰는 것은 드문 일이기에 거구인 ‘차돌’에 대한 기대치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차돌’은 1987년 2월 3세의 나이로 데뷔한 후 3전 전승을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내더니 그해 11월 일간스포츠 대상경주에서 우승을 하면서 경력 2년차의 신출내기 홍대유 기수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경주 초반에는 뒷전에서 달리다가 탄력이 붙으면 삽시간에 선두그룹을 추월해 버리는 ‘차돌’의 추입력에 경마팬들은 환호를 보내곤 했다.
‘차돌’의 전성기는 1989년 과천경마장이 오픈하면서 시작됐고 할 수 있다. 당시 호흡을 맞췄던 홍대유 조교사(현 서울조교사협회장)는 “뚝섬시절에는 시계방향으로 경주를 했는데, 결승선 직선주로에서 항상 안쪽으로 심하게 기대는 버릇을 보였다. 당시 결승선 직선주로가 짧았기 때문에 그나마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과천경마장으로 오면서 진행방향이 반대로 바뀌면서 사행하던 버릇이 사라졌고, 그 해에 11전 9승 2착 2회를 기록하며 대상경주 3회 우승과 5연승을 기록했다. 과천경마장으로 이전이 ‘차돌’에게는 날개가 된 셈이다”라고 회상한다.
1989년 ‘차돌’은 3개 대상경주(무궁화배, 마사회장배, 그랑프리)를 석권했다. 당시 한 해에 개최되던 대상경주 수가 5∼6개에 불과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차돌’이 절반의 대상경주를 가져간 것이다.
‘차돌’하면 괴력으로도 유명한데, 1989년 그랑프리에서 ‘차돌’이 67kg의 부담중량으로 우승한 것은 한국 그랑프리 우승마 중 가장 높은 부담중량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차돌’은 살인적인 부담중량을 달고 경주를 많이 치른 것으로 유명하다. 65㎏ 이상의 부담중량을 10회 연속 짊어지기도 했고, 68㎏이라는 무시무시한 중량을 달고 뛴 적도 있다. KRA한국마사회가 1985년부터 현재까지 치러진 전체 핸디캡 경주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68㎏의 부담중량을 짊어지고 경주에 출전한 말은 ‘포경선’과 ‘차돌’뿐이다.
‘차돌’은 홍대유 조교사의 애마로도 많은 화제를 낳았다. 홍대유 조교사가 기수로 경주로를 달리던 시절, ‘차돌’은 그의 자가용으로 불리웠고, 홍 조교사에게 많은 영예를 안겨주었다. ‘차돌’이 거둔 26승 중 홍 조교사와 함께 한 것이 24승이다.
홍대유 조교사와 ‘차돌’의 인연은 1991년 3월말 기수들의 대대적인 소속조 변경으로 인해 소원해지기 시작했고, 7세에 접어든 ‘차돌’의 활약도 서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쉽사리 우승을 하진 못했지만 꾸준하게 순위권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던 ‘차돌’은 말년에 운동기 질환이 심해져 힘든 레이스를 펼치다가 1994년 10월 71전 26승, 2착 18회를 기록하고 10세의 나이로 경주로를 떠났다. 당시는 개인마주제로 전환된 지 1년여밖에 안된 시절이라 은퇴식도 치르지 못한 채 이름 없는 승용마로 팔려갔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홍대유 조교사(당시 기수)는 ‘차돌’에 대한 소식을 수소문했고, 이 소식을 들은 ‘차돌’의 주인이 홍대유 조교사에게 무상 기증을 했고, 홍대유 조교사는 마사회 승마훈련원에 기증을 하면서 승용마로 활용됐다.
경주마시절 590kg에 달하던 ‘차돌’은 은퇴 후 600kg이 넘어가는 체구로 승마훈련원을 찾은 승마인들에게 각광을 받았지만, 운동 중 넘어지는 사고로 인해 결국 폐사되고 말았다.


권순옥 | 경마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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