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마(6) ‘대견’

  • 권국장 | 2018-10-3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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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마(6) ‘대견’


‘대견’ 개인마주제 이후 첫 명마 계보를 잇다



 

‘80년대와 ’90년대를 주름잡던 명마들이 줄줄이 퇴사를 하면서 서울경마장은 뚜렷한 강자가 없이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런 혼란을 잠재운 것이 바로 호주산 말 ‘대견’이다.


 

현재 한국마사회에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있는 말 중 최다승 기록은 43승의 ‘신세대’와 33승의 ‘새강자’에 이어 ‘대견’이 29승으로 3위에 랭크돼 있다. 아주 튼튼한 말이 한 달에 한 번 경주에 출전한다고 할 때 3년가량 활동을 해야 겨우 30회 정도 경주에 출전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1993년 호주에서 수입된 ‘대견’은 호주에서의 성적도 7전 1승에 불과한 평범한 경주마였다. 캐나다산 부마 ‘노던리젠트’(Northern Regent)와 호주산 모마 ‘로맨틱이브닝’(Romantic Evening) 사이에서 태어난 520㎏의 갈색말 ‘대견’은 당시 외산마 도입을 위해 호주를 찾았던 최혜식 조교사의 눈에 들어오면서 한국으로 오게 됐다. 최 조교사는 호주 시골목장에서 ‘대견’을 보는 순간 명마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후에 밝힌 바 있다.


 

1993년 6월경 한국마사회 소속으로 수입된 ‘대견’은 곧바로 개인마주제 전환과 함께 개인마주 소유로 데뷔전을 치렀는데, 데뷔전에서 2착을 기록했다. 이후 6연승을 질주하면서 뛸 때마다 군이 달라지는 진기록을 세웠다. 당시 ‘대견’에는 김태경 기수(현 부경 활동)가 5연승을 같이 했고, 1군(C1) 첫 경기는 강병은 기수(현 부경조교사)와 호흡을 맞춰 우승을 차지했다.


 

첫 대상경주 출전이던 ‘94년 5월 무궁화배 대상경주에서 2착에 머물렀지만, 그해 10월 문화관광부장관배 대상경주에서 61kg의 가장 높은 부담중량으로 첫 대상경주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대견’은 그랑프리 우승(‘95), 한국마사회장배 우승(‘96)을 기록했다. 당시 조교사 중 가장 멋쟁이로 불리던 최혜식 조교사는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시상식에 참석해 경마팬들의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1993년 4세부터 2001년 12세까지 무려 9년간 경주마 활동을 하면서 29승을 기록한 ‘대견’은 당시 경쟁하는 말들과 비슷한 수준의 경기력을 만들기 위해 핸디캡으로 무려 60~64㎏의 부담중량을 받아야 할 정도로 월등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과도한 부담중량으로 인해 여러 번의 부상으로 잦은 휴양을 거쳐야 했었다.


 

또한 ‘대견’이 마주로 인해 우여곡절을 겪은 일화도 유명하다. 마주가 부도를 내면서 ‘대견’에게 차압이 붙었고, 이로 인해 ‘대견’은 한동안 경마장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장기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대견’은 복귀 후에도 변함없는 경주력을 선보여 경마팬을 환호케 했다.


 

거세마였던 ‘대견’은 12세까지 활동을 하다가 2001년 7월 22일 명예로운 은퇴식을 치르고 대구의 한 승마인에게 보내졌다. 안타까운 것은 이후 ‘대견’의 종적이 사라진 것이다. 수 년전 한국마사회 말박물관에서 ‘대견’의 흔적을 찾기 위해 신문과 소셜네크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수소문을 했지만 결국 어떠한 소식도 찾지 못해 큰 아쉬움을 남겼다.






권순옥 | 경마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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