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교복 선경자전거

  • 송라
  • 2026-05-25 18:36 조회 413



중학교 시절에
지나간 날을 돌아보는 일은 언제나 가슴 한구석을 아련하게 적셔온다. 문득 가만히 눈을 감으면, 까까머리에 빳빳한 검정 교복을 입고 등교하던 1970년대 중반, 그 푸르렀던 중학교 시절의 풍경이 어제 일처럼 선하게 밀려온다. 한 반에 예순 명, 일흔 명씩 미어터지던 교실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푸른 꿈을 공책 위에 꾹꾹 눌러썼다.

새 학기가 시작될 때면 아버지가 허리띠를 졸라매며 사주셨던 ‘동아전과’는 우리들의 거대한 보물창고였다. 그 두꺼운 책 한 권이면 학교 숙제도, 다가올 시험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침을 묻혀가며 쥐었던 침침한 ‘동아연필’의 흑연 냄새는 곧 배움에 대한 갈증이었고, 가난을 벗어나고자 했던 시대의 열망이었다. 비록 손가락 끝은 늘 까맣게 물들어 있었지만, 서너 자루의 연필을 깍지 통에 고이 담아두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지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매일 살림을 책임지던 어머니들의 손을 가장 덜어주었던 고마운 존재는 단연 선경합섬의 ‘스마트 교복’이었다. 부드러운 모방 교복은 빨기도 힘들고 말리는 데 며칠이 걸렸지만, 석유화학 기술로 만든 100% 나일론 스마트 교복은 달랐다. 고단한 하루 끝에 저녁 늦게 슥슥 비벼 빨아 마당에 걸어두면, 밤새 물기가 쏙 빠져 아침이면 어김없이 뽀송뽀송하게 말라 있었다.

 다리미질 한 번 거치지 않아도 깔끔하게 펴지던 그 옷은, 자식에게 구겨진 옷을 입혀 보낼까 밤잠 설치던 어머니들에게 눈물겨운 가사 혁명이었다. 등하굣길을 함께 달리던 튼튼한 ‘선경자전거’ 역시 우리 베이비붐 세대의 가장 친한 동반자였다.
일상의 소소한 풍경 속에는 또 다른 대기업들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입안 가득 달콤함을 전해주던 ‘롯데껌(쥬시후레쉬, 후레쉬민트, 스피아민트)’ 삼총사는 등하굣길의 작은 사치였고, 매일 아침 소금 대신 입안을 개운하게 닦아주던 ‘럭키치약’은 집집마다 안방의 필수품이었다. 심심할 때 씹던 껌 한 조각, 하루 두 번 이빨을 닦던 그 작고 소박한 동전들이 모여 거대한 자본의 강물을 이룰 줄은 당시에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월은 흘러 우리가 흘린 땀방울만큼 세상은 눈부시게 변했다. 껌을 씹으며 모인 돈은 잠실벌에 세계적인 123층 롯데타워를 우뚝 세웠고, 전 국민의 이빨을 닦아주던 치약 튜브의 플라스틱 화학 기술은 훗날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최고의 전기차 배터리와 가전의 기적을 낳았다. 맨땅에서 건설과 자동차로 뼈대를 세운 현대의 뚝심은 대지를 다졌고, 그 현대의 품에서 자란 반도체 기술은 IMF라는 모진 바람을 맞아 표류하다가, 과거 교복과 자전거와 세탁비누로 현금을 단단히 모아두었던 선경(SK)의 자본력과 결합하여 마침내 오늘날 세계 1위의 AI 반도체 거인, ‘SK하이닉스’라는 찬란한 꽃을 피워냈다.

돌아보면 동아연필로 꿈을 쓰고 동아전과로 세상을 배우며, 밤새 말린 스마트 교복과 선경자전거로 새벽을 깨우던 우리 베이비붐 세대의 서글프고도 치열했던 일상이 있었기에, 껌을 씹어 초고층 타워를 올리고 치약을 짜서 세계적인 전기차 배터리를 만들며 거대한 건설과 자동차의 대지 위에서 마침내 스마트폰과 세계 주식시장을 뒤흔드는 첨단 AI 반도체의 신화를 일구어낸 오늘날 위대한 대한민국의 대서사시가 완성될 수 있었다.

결국 지금 전 세계를 무대로 질주하는 대한민국의 최첨단 기술과 눈부신 번영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기적이 아니다. 1970년대 그 바쁘고 고단했던 시절, 자식들을 위해 밤새 교복을 빨아 널던 어머니들의 거친 손등과, 흑연 가루 묻혀가며 세상을 배우던 베이비붐 세대들의 치열했던 청춘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위대한 인간 승리의 드라마인 것이다. 그 시절 나의 부서진 연필깎이 소리와 빳빳했던 교복의 촉감이 오늘따라 더욱 그리워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