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한국인 기수 김용백(김자근봉)

  • 운영자 | 2010-08-25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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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한국마사회가 발행한 ‘한국경마 60년사’는 1921년 5월 용산 신연병장에서 경성구락부 주최로 열린 전선경마대회(全鮮競馬大會)에 일본인 기수들과 함께 목장관리사에서 임시로 기용된 김용백 기수를 한국 최초의 기수로 꼽고 있다.


서구식 경마의 효시로 알려진 1898년 관립외국어학교 연합운동회에서 당나귀 경주를 벌인 학생들이나 1907년 한강 백사장에서 경주를 벌였던 기병대, 그리고 1914년 용산 구연병장에서 열린 조선경마대회에 기수로 참가한 승마구락부 회원들도 있지만 ‘全鮮競馬大會’가 완전한 형태를 갖춘 한국 근대경마의 시발점이자 이때부터 직업기수도 등장했기 때문에 김용백씨를 최초의 기수로 소개하고 있다.


-최초의 기수 양성소 출신 기수들(72)


이 후 1921년 가을에는 일본인 아라이쇼타로(荒井初太郞)가 운영하는 여의도 아라이목장으로 자리를 옮겨 경마대회가 열렸으며 이 때에 일본인 기수와 함께, 목장에서 일하던 김자근봉(金者斤奉, 당시 18세, 후일 김용백으로 개명)과 이점복(李占福, 당시 17세, 본명 이을남) 기수가 처음으로 기승했다고 적고 있다.



김자근봉 기수는 1921년(당시 18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38년 제2회 천황상(1938년 05월 15일 / 한신 경마장2700m / 하세파크(모3세) / 기수:김자근봉 / 조교사: 김자근봉 / 마주: 카도쿠라 츠네오 / 생산자: 모리타 목장)에서 우승하여 일본에서도 이름을 떨쳤다. 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한 김기수는 한국에서 58년까지 조교사로 활약했고 69년 작고했다.

2004 천황상 입장권



초창기의 한국인 기수는, 몸집이 왜소하고 나이가 많은 일본인 기수보다 체격이 크고 나이도 어려 기수로서의 여건이 월등히 나았으면서도 항상 차별을 당하기 일쑤였다. 특히 김자근봉 기수는 경주 중에 일본인 기수가, 1등으로 달리던 김기수의 말을 때려 말이 넘어지는 사고가 났지만 조교사가 일본인 기수를 처벌하지 않고 김기수만 홀대하기 시작하자 결국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출처:마부님의 "승마,경마 - 마굿간"
(http://blog.naver.com/rhrhektzja)